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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만큼 영화도 좋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주제로 한 책은 잘 보지 않았다. 내게 영화는 옆집 친구 정도의 친근한 것이었다면 영화를 주제로 한 책은 옆 학교 선생님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런 와중에 텀블벅에서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바로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였다. 책이 너무 궁금해서 구매할까 고민하다가 마감일을 놓쳤다. 내가 후원하진 않았지만 2,220명이 후원하고, 34,351,000원이 모금되어 펀딩을 성공했다. 펀딩만으로 2천 부를 넘긴 셈이니, 이 정도면 대성공 아닌가?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의 텀블벅 펀딩 결과

 

잊고 있던 이 책을 도서관에서 다시 만났다. 계속 대출되고 있어서 예약해놓고 겨우 받았다. 수록된 클리셰 중에,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를 책 제목으로 내세운 건 페미니즘 냄새만 풍겨도 책이 팔린다는(물론 과장한 표현이다) 출판계 분위기가 한몫한 것 같다.

 

클리셰 뜻, 클리셰란 대체 무슨 뜻일까

책을 읽기 전, 내가 아는 수준에서 클리셰란 '진부한 설정' 정도였다.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의 저자 듀나는 더 쉽고 자세히 클리셰를 정의해줬다. 

 

어원, 네, 어원부터 짚고 넘어가 보죠. 클리셰는 19세기의 인쇄 용어에서 출발했습니다. 클리셰는 당시 인쇄공들이 활자판에 쉽게 끼워 넣을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놓은 조판이었습니다. 이게 19세기 말부터 보편적인 의미, 그러니까 별로 노력하지 않고 집어넣은 진부한 문구나 생각, 개념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현대어에서 클리셰란 무엇일까요? 그건 예전에는 독창적이었고 나름대로 진지한 의미를 지녔으나 지금은 생각 없이 반복되고 있는 생각이나 문구, 영화적 트릭, 그 밖의 기타 등등입니다.

반복된다는 것만으로는 클리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원래 우리는 그렇게 독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전도서의 저자가 말했듯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까요. 아직도 수많은 영화와 소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되풀이된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이혼하지만 그걸 보고 클리셰라고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수없이 보고 들은 내용을 반복할 뿐이지만 《밀회》는 얼마나 강렬한 영화인가요. - 4~5쪽

 

예전에는 독창적이었으나 생각 없이 반복한 탓에(=남발한 탓에) 진부해진 것이라니. 여기에 핵심은 '생각 없이'에 있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양심에 찔렸다. '또 이런 설정이야?'라면서 영화 속 클리셰를 비웃는 나는 얼마나 '생각 없이' 진부하게 살고 있는가. 얼마나 무의미한 반복을 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오락영화로 봐주세요'의 내용은 더 공감이 갔다. 

 

논리를 검토해보기로 하죠. 이런 사람들이 ‘그냥 오락영화’라고 말하는 작품들은 척 봐도 오락영화인 게 분명한 작품들입니다. 아무도 주성치의 코미디 영화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심각한 주절거림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나 기자들 역시 거기에서 오락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임무는 ‘훌륭한 오락영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훌륭한 오락영화’라고 하지 않고 ‘그냥 오락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첫째, 오락영화는 처음부터 높은 질을 갖출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 운명을 받아들여 처음부터 예술적 도전을 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략)

모든 사람이 같은 자신감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만 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 정도는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뻔한’ 오락영화에 그친다 해도요. - 32~33쪽 07 그냥 오락영화로 봐주세요

 

영화인만 그럴까. 저는 그냥 회사원(지금은 프리랜서)인데요, 저는 그냥 평범한 블로거인데요.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저자 듀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안에는 '책임질 수 있는'이란 의미도 포함된 것 아닐까? 자신감도 결국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에 생기는 것일 테니 말이다.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의 부제는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이다. 책에는 89개가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 내용을 보고 피식 웃었다.

 

틴 코미디 《쉬즈 올 댓(She’s All That, 1999)》은 고등학생 프레디 프린즈 주니어가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미술반의 ‘너드’인 레이첼리 쿡을 프롬 퀸으로 만들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죠. 어떻게 너드를 프롬 퀸으로 만드냐고요? 흠, 레이첼 리 쿡의 캐릭터는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린즈 주니어의 캐릭터가 쿡의 캐릭터에게 말하죠. “안경을 벗어봐.”

와우!!! 이 장면은 ‘안경 벗기기 클리셰’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158쪽 52 안경을 벗어봐

 

물론 책에서는 위 내용으로 설명을 끝낸 것은 아니다. 왜 우리가 극 중 평범한 캐릭터를 전혀 평범하다고 느끼지 않는지, '안경을 벗어봐'라는 말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 등에도 맛깔나는 설명이 함께했다.

 

영화의 특성을 생각해보게 한 클리셰 설명도 있었다.

 

‘여기서 나가자(Let’s get out of here)’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사입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조사했을 때는 그랬습니다. 지금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대사는 ‘I love you’보다 훨씬 쓸모 있기 때문입니다. ‘I love you’는 연애 장면에서나 쓸 수 있지만 ‘Let’s get out of here’는 어디로든 갑니다. (중략)

이 대사가 소설이나 연극보다 영화에서 더 자주 쓰이는 이유는 극도로 영화적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대사의 비중이 크고 장면 전환이 잦은 영화라는 장르에서 이 대사가 가장 자주 쓰이는 건 당연합니다.

게다가 이 대사의 의미는 보기보다 넓습니다. 피투성이 군복을 입고 고함을 치면 주인공들이 적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행복한 연인의 입에서 나왔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끝나고 로맨스가 꽃필 것이란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이유로 자리를 옮기며, ‘Let’s get out of here’는 그 모든 순간들의 이유를 담고 있습니다. - 170~171쪽 56 여기서 나가자

 

듀나의 설명처럼, '여기서 나가자'는 대사는 그 억양까지 기억이 날 정도로 익숙한 대사다. 이 대사가 유독 영화에 많이 나온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수긍이 갔다. 어, 정말 그렇네.

 

'반전'과 '부활'을 설명한 부분도 좋았다. 클리셰를 설명한 것이었지만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이었다.

 

반전이란 오직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전을 예측한다고 해도 반전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그건 음악 끝의 코다(음악의 끝에 종결부로서 추가하는 부분)와 같은 것입니다. 반전은 ‘사람들을 얼마나 놀라게 하느냐’로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조상 얼마나 자기 기능을 하느냐’가 진짜 평가 기준이죠. - 91쪽 29 반전

두 개의 극단적인 감정이 교차하면서 발생하는 극적인 효과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슬픔 뒤에 오는 기쁨은 훨씬 강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보다 더 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이 비극적 결말의 장점과 해피엔딩의 장점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지요. 주인공의 가짜 죽음을 이용해 비극적 결말에 사용되는 온갖 감정 폭발을 다 써먹으면서도 관객들을 더 동원할 수 있고 극장 나와서도 기분도 좋아질 해피엔딩을 버리지 않아도 되잖아요. - 106쪽 35 부활

 

반복된다는 것만으로 클리셰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책 덕분에 배웠다. 예측할 수 있는 반전이라 해서 그 가치가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을 듀나의 설명을 보고 알게 되었다.

 

저자 듀나가 20년 전부터 써온 글 중 고르고 다듬어서 책으로 낸 것이라 한다. 그래서 예로 등장하는 영화가 조금 아쉬웠다. 내가 본 영화보다 못 본 영화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미 서문에서 익숙하지 않은 영화가 수록되었을지 모른다고 안내하기에 긴장하고 봤는데, 우려했던 것보단 나았지만 아쉬웠다.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책의 부제처럼 재미있는 클리셰 사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가장 잘 소개한 글인 듯하여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추천사를 가져왔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 하겠다.

 

“그래도 개는 산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재난 영화에 개가 등장하면 누구나 생각하리라. 저 개는 살겠네. 듀나 작가의 《클리셰 사전》은 ‘진부함의 재미’라 부를 수 있을 클리셰를 모은 결과물이다. 무비판적 자기 복제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클리셰 없이는 어떤 장르든 성립하기 어렵다. 많은 클리셰는 세상의 편견을 반성 없이 가공해 이야기 속에 삽입하기 좋은 캐릭터의 형태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세상이 바뀌면 클리셰의 맥락도 등장 빈도도 달라지기 마련. 이렇게나 재미있는 사전이라니. - 이다혜 《씨네21》 기자(271쪽)

 


 

책 제목 :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부제 :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
분야 : 시/에세이
소분야 : 한국에세이
지은이 : 듀나
출판사 : 제우미디어
쪽수 : 272쪽
출간일 : 2019년 12월 05일
ISBN : 978895952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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