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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 리뷰어(북딩 3기) 활동으로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음을 미리 밝힙니다.


'무지의 지'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 애초에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인식이 없으면 학습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 『철학이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266쪽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빌려와 말하자면, 나는 내가 미술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미술을 더 탐구해야겠다는 의지도 없다. 그저 관심이 약간 있을 뿐. 그런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저자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줄리언 반스는 맨 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다. 내가 아는 그의 작품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인데 에세이, 게다가 미술을 말하는 에세이는 어떨까 궁금했다.

 

줄리언 반스,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면 해설사와 꼭 함께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믿는다. 내가 눈으로만 볼 때와 설명을 들으면서 볼 때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이 책은 해설사와 함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게다가 스토리텔링을 굉장히 잘하는 해설사.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이야기한 첫 장부터 느꼈다. 이건 에세이가 아니라 매 장이 한 편의 소설 같다는 것을.

 

그러므로 제리코가 그리지 않은 다른 무엇을 상상해보자. <난파 장면>의 배역을 수척한 사람들로 바꿔보는 것이다. 오그라든 육신, 곪은 상처, 나치 강제수용소 포로와도 같은 얼굴. 이런 세부 묘사를 보면 마음이 뭉클해지고 동정심이 일어날 것이다. 캔버스의 바닷물과 어울리게도 눈에서 짠물이 용솟음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덤비는 듯한 그림이 될 것이다. 그림이 우리에게 너무 직접적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누더기 차림의 쇠퇴한 조난자들은 그 흰나비와 같은 영역의 감정을 유발한다. 앞엣것은 우리에게 손쉬운 비애감을, 뒤엣것은 손쉬운 위안을 강제한다. 이 수단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제리코가 추구하는 관객의 반응은 단순한 동정과 분노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 감정이 히치하이커처럼 도중에 잠깐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하략) - 54쪽

 

 

카드 뉴스로 살짝 엿보았던 드가의 이야기는 좋았다. 내가 가진 '드가에 대한 편견'을 바꿔주어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 드가는, 장-프랑수아 라파엘리의 말처럼 '여자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화가인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 속의 여자들'을 그려냈다고 생각하고 드가의 그림을 다시 보니, 내가 정말 편견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181쪽에 실린, 드가의 <머리 손질> 속 붉은 머리 여자는 머리 말릴 때의 나 같기도 하더라.

 

파리 근교를 그림 화가 장-프랑수아 라파엘리는 1984년 드가를 가리켜 "여자의 은밀한 모양을 품위 없게 그리는 일에 주력하는" 화가라고 주장했다. 드가는 "틀림없이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175쪽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그림들은 가장 원기 왕성한 육체를 나타낸 것 같았다. 드가의 무용수들은 이전의 남성 화자들이 그리던 요정 같은 소녀나 요염하고 조숙한-우아하지만 약간 포르노 같은 구석이 있는-소녀들이 아니다. 그들은 땀 흘리고 푸념하고 근육이 끊어지고 발가락에서 피가 나는, 중노동을 하는 현실 속의 여자들이다. - 182~183쪽

 

 

루치안 프로이트와 초상화 이야기를 하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데, 글을 읽으며 조선시대 왕들의 초상이 떠올랐다. 발췌한 대목의 마지막 문장, '초상화는 실물의 인격을 얼마나 나타내는가' 때문에 그랬나 보다.

(참고_ 루치안 프로이트의 할아버지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이는 가치 있는 말일 수도, 쓸데없이 복잡한 말일 수도 있다. 추측건대, 초상화가가 원하는 건 그 대상의 실물을 아는 사람이 그림을 보고 "그래, 저건 아무개야, 다만 실물보다 더 아무개 같아"라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의 '심화'가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유사성'은 버려지지 않았으며 또 버려질 수도 없다-결국 다른 사람보다 더 분명히 대상을 보지 못한다면 프로이트의 저 유명한 치열한 응시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가 과연 어떤 초상화를 보고 "와, 멋진데! 그런데 아무개 같지는 않은걸. 사실 딴 사람 같은데, 이상하게 아무개의 심화된 모습 같아"라는 반응을 보일 일이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 의문은 또한 다른 의문과 뒤섞인다. 즉, 그 초상화는 실물의 인격을 얼마나 나타내는가, 그 사람의 도덕성과 얼마나 닮은 화상(畵像)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략) - 366~368쪽

 

책 제목을 잘 지었다. 미술 산책을 한 기분이다. 그것도 아주 사적인, 줄리언 반스라는 소설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산책.

 


책 제목 :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분야 : 시/에세이
소분야 : 영미에세이
지은이 : 줄리언 반스
출판사 : 다산책방
쪽수 : 424쪽 
출간일 : 2019년 09월 30일 
ISBN : 979113062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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