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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어려서는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간다거나 졸업여행을 가는 것이 여행의 대부분이긴 했다. 불편한 점도 많고 싫은 점도 많았지만 단체로 간 것이니 그렇겠지 생각하면서 나름의 장점과 좋았던 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제는 나에게도 여행의 선택권이 생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행은 지치고 피곤하고 신경도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도, 단둘이 가는 여행도, 나 혼자 가는 여행도 모두 다녀 봤지만 그냥 그랬다. 국내 여행도, 국외 여행도 다녀 봤지만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좋네' 하는 수준이랄까. 어떤 때는 옆에서 즐거워하는 일행을 보면서 나도 이만큼은 감동해 줘야 하나 살짝 고민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행이 끝난 뒤는 달랐다. 여행 중인 순간보다 여행을 이제 막 끝내고 돌아온 순간보다, 이미 몇 해가 지난 지금, 그 여행을 생각하면 감흥이 다르다. 일상에서 벗어난 일, 반복된 일에서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일까. 비슷한 시점에 겪은 다른 일에 비해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그 여행에서 그랬지 하며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내가 내뱉은 '좋네' 한마디가 커지고 퍼지며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지금의 나에게 거대한 태풍이 되어 온 기분.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추억이라는 태풍으로...

 

뒷북 감흥자인 나와는 달리,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여행을 즐기는 지인들이 있다. 그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여행의 장점은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새로운 곳을 가고,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맛보며 새로움으로 채워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 중인) 나 역시도 그 점은 공감한다. 다른 사람은 여행을 어떻게 느끼고, 기억할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소설가 김연수의 <언젠가, 아마도>는 그래서 반가운 책이었다.

 

이동 시간이 이처럼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면, 우리는 여행의 목적을 더 잘 알게 되리라.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바뀐 풍경은 낯설다. 새롭고 또 신기하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상대적인 이야기다. 나를 둘러싼 풍경만 낯설고 새로운 게 아니라 그 풍경 속의 나 역시 낯설고 새로운 존재, 즉 이방인이다. 하루나 이틀 전,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를 떠올리면 이건 기묘한 변신담처럼 느껴진다.

 

정해진 규칙이라면 따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내 성향 때문에 내 일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집에서 회사로 출발하는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시간 등 굉장히 규칙적이다. 정해진 대로 따르는 편이 속 편하다고 생각이야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이 때로는 나를 지치게 한다. '지겨워, 우리 이제 그만하자'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나 보다. 지긋지긋해진 일상에 ‘안녕’할 수 있어서.

 

보이는 게 예전과 같지 않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보이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세상은 모르겠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알면 달리 보인다. 즉 생각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결국에는 세상을 바꾼다.
(중략)
그런데 거기까지 가서야 나는 최진석 씨가 니혼슈보다 맥주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나 때문에 열흘 가까이 그는 니혼쥬만 마셨던 모양이었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애틋한 기분도 들었다. 나는 모르는 게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바뀔 수 있으며 바뀌어야만 했다.
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은 모르면 늘 똑같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날마다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결 같은 것처럼 보인다면,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여행'을 모른다. 모르니 여행에서 느끼는 것도 남들에 비해 적은 것인가 보다(어쩌면 내가 드러내는 표현의 강도가 이게 최대치인데 나조차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잠시 해 본다). 요즘 내 세상은 너무 똑같다. 좋은 상태로 똑같아도 지겨울 판에 나쁜 상태로 똑같으니 너무도 지친다.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것일까? 여행을 떠나면 나에게도 다른 시선이 생길까? 지금 나는 다른 시선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를, 나의 마음을, 나의 상황을... 그리고 나의 퇴사 욕구를(헛).

 

히말라야나 남극이나 아마존에 간다면, 나는 이전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존재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럼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어떻게 하면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 나를 둘러싼 풍경을 바꾸면 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새롭고, 또 신기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 그러므로 여행이다. 끝났을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저자의 말처럼 여행지에서 나는, 다른 곳에 놓인 나는, 이곳에서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될까? 나는 오늘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여행자의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여전히 여행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뒷북 감흥자인 나는 먼 훗날 나의 일행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며 깔깔댈지 모른다.

 

"그때 기억나요? 우리 그때 KTX 할인한대서 갑자기 강릉 기차표부터 덜컥 끊었잖아요. 이거 퇴사 여행이냐며 키득거렸잖아요. 그래도 그때 참 좋았죠. 즐거웠어요."

 

언젠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책 제목 : 언젠가, 아마도
분야 : 시/에세이
소분야 : 한국에세이
지은이 : 김연수
출판사 : 컬처그라퍼
쪽수 : 264쪽
출간일 : 2018년 07월 24일
ISBN : 9788970599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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