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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기대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단지 그 상황을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다.

감정과 인식은 각자 다른 뇌 영역이 매개하기 때문에 알아차림에는 감정이 필요치 않다.

 

 

우울한 세상이다. 우울증 치료 일기인 떡볶이 책(원제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도 그렇고, 우울증 관련 책이 부쩍 늘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우울한 감정도 들여다보면 결국 뇌의 짓이다. 내 감정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뇌는 이미 탐구해 놓았을 테니, 뇌를 알고 싶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감정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는 건데?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우울할 땐 뇌과학>을 펼쳤다.

 

2018/10/06 - [책수다] -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저자의 솔직한 우울증 치료일기 훔쳐보기

 

저자는 우울증이란 뇌 자체에 결함이 생긴 것이 아니라 특정 신경 회로가 우울 패턴으로 가도록 맞춰진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울 패턴이 형성되면 뇌 전체에서 하강나선으로 향하는 수십 가지 작은 변화가 잇따라 일어나고, 그 패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한다.

 

전전두피질은 걱정이 너무 많고, 감정적인 변연계는 별것 아닌 일에도 너무 쉽게 반응한다. 섬엽은 만사를 실제보다 더 나쁘게 느끼도록 하고, 전방대상피질은 부정적인 면에만 집중해 상황을 악화시킨다. 게다가 전전두피질은 배측선조체와 측좌핵의 나쁜 버릇들까지 억제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울증을 극복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각각의 회로가 서로를 아래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우울할 때는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자꾸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 같다.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누군가 자꾸 나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기분도 드는데, 뇌가 하강나선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뇌, 네 이놈!).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 텐데, 쉽지 않다. 어떻게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아래로 향하는 뇌의 방향을 다시 위로 향하도록 돌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지하면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고 그러면 전전두피질이 편도체를 진정시킨다. 일례로 '감정을 언어로 옮기기'라는 주제로 한 fMRI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감정적인 표정이 담긴 얼굴 사진을 보여주는 실험을 진행했다. 예상대로 각 참가자의 편도체가 사진 속 감정에 반응해 활성화됐다. 그러나 감정적인 편도체의 반응성은 감소했다. 다시 말해 감정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그 감정이 야기하는 효과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불안에는 감지하기 어려운 단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문제가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신체적 증상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불안 탓이라는 건 모른다. 숨이 가쁘거나 어지럽거나 근육이 긴장되거나 배탈이 나거나 가슴에 통증이 있거나 그냥 전반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불안 때문일 수 있다. 불안을 의식하는 것이 불안을 더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것을 고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뇌의 하강나선을 상승나선으로 바꿔 줄 여러 방법을 설명하였는데 그중 '알아차림(nonjudgmental awareness)'에 대한 설명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알아차림이란 말 그대로, '감정적 반응을 덧붙이지 않고 현재를 의식하는 일'을 말한다. 감정은 넣지 말고 '지금 이렇구나' 하면 된다는 말이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자신이 무엇을 알아차리는지 알아차려라. 우리는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정보의 조각들을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편향을 갖고 있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다. 빨간불에 걸려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화가 난다면 이렇게 생각하라. ‘오호, 흥미로운데? 나는 이번 빨간불은 알아차렸는데 아까 파란불을 통과할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네.’ 한마디로 판단하지 않는 알아차림을 연습하라는 말이다. 판단하지 않는 알아차림은 마음챙김의 한 형식이다. 상황이 기대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단지 그 상황을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다. 감정과 인식은 각자 다른 뇌 영역이 매개하기 때문에 알아차림에는 감정이 필요치 않다. 실수를 감지하면 감정적인 편도체가 자동적으로 가동될 수 있지만, 자신의 반응을 인식하면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어 편도체를 다시 진정시킬 수 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도 '알아차림' 이야기는 꽤 많이 나온다. 법문을 들으면서 알아차림을 연습해야지 했지만 쉽지 않았다. 스님께서는 그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지만 잘 안 되었다. '내가 화가 났구나'를 알아차렸지만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내가 우울하구나'를 알아차렸지만 우울한 마음이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제대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분이, 스님께 질문을 했다.

 

"스님, 저는 알아차렸는데도 그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내가 화가 나는구나 알아차렸지만 계속 씩씩거리고 있어요."

 

법륜스님의 답은 명쾌했다. 오래전 들었던 즉문즉설이라 각색되었을 수 있지만 최대한 옮겨보자면 이렇다. (잘 옮길 자신은 없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즉문즉설을 접해 보길 권한다.)

 

화라고 하는 것은 마치 하늘로 날아가는 공과 같다. 날아가는 그 공은 '아, 내가 공(화)을 던졌구나!' 하고 알아차린 순간부터 힘을 잃는다. 그러나 알아차렸다고 갑자기 공이 사라지진 않는다. 날아가던 관성이 있으니 포물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진다. 다시 말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공은 계속 날아갈 것이고, 더 빨리 알아차릴수록 더 빨리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알아차렸는데도 계속 씩씩거린다면 '알아채 봐야 화가 누그러들지 않는구나' 생각하지 말고, '내가 알아차린 것이 조금 늦었구나' 생각하면 된다.
단, '화가 나니 참아야겠다' 하는 것은 올바른 알아차림이 아니다. 그것은 알아차림이 아니라 억누르는 것이고, 그렇게 눌러 놓은 것은 나중에 용수철 튀어 오르듯 튀어나온다. 알아차림은 알아채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날아가는 공에 더 힘을 보태 주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항상 수행해야 한다.

 

하늘로 던진 공(상승 상태)을 알아차려야 땅으로 떨어진다(하강 상태)는 설명은 위아래 방향만 다르지 결국 <우울할 땐 뇌과학>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알아차려야 하강나선에서 벗어나 상승나선을 만들 수 있고(우울할 땐 뇌과학), 알아차려야 날아가는 공을 땅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법륜스님).

 

스님의 법문을 접한 지도 2년이 넘었고, <우울할 땐 뇌과학>을 읽은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와 싸우고 있을 때, "너 왜 그렇게 화를 내니?"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그 말이 맞는데도) "나 화 안 났거든?"이라고 뻔뻔하게 답하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 제목 : 우울할 땐 뇌과학
분야 : 인문
소분야 : 심리
지은이 : 앨릭스 코브
출판사 : 심심
쪽수 : 336쪽
출간일 : 2018년 03월 12일
ISBN : 9791156757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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