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로였다. 해야 할 일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나에게 맞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그 이유만으로 나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대학 때 학생회 활동을 했다. 그때 한 선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구나."
물론 칭찬이었다. 생각보다 잘 해냈구나 하는 마음을 담은 칭찬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지만 고개는 갸우뚱했다.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다'는 소리인지 싶었다. 그래도 열심히 한 나에게 건넨 따뜻한 말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사회생활을 하니 그 말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자리는 그저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만 만들 뿐이었다.
첫 직장에서는 전공과 밀접한 일이라 그랬는지 무난하게 흘러갔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조금씩 기복은 있었지만 일 잘한다는 칭찬을 꽤 들었다. 심지어 퇴사 후에도 들었다. 나 혼자 하던 일을 내가 퇴사한 후에 5명이나 뽑아서 처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일 잘하는 애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직장에서, 나는 바보가 되었다.
저자와는 반대의 상황이다. 저자는 화물영업소에서 일할 때 자신을 간단한 일도 못하는 바보라고 자책했다. 돈 계산도 100원, 200원씩 틀리고, 운송 프로그램도 잘 다루지 못했으며, 화물을 찾으러 온 사람 얼굴과 업체명을 잘 연결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쉽게 해내는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랬던 저자가 직장을 옮기고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매일 '이런 간단한 일도 못하는 바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며 눈물을 훔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 운 좋게 다른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주 업무는 직장의 SNS 계정들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SNS에 올릴 글을 쓰고 이미지와 동영상을 제작하거나 이벤트를 운영했다. 나는 쉽게 해냈다.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동료들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들어왔다며 좋아해주었다.
나는 그대로였다. 더 이상 돈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고, 운송 프로그램을 다루지 않아도 되고, 어제 잠깐 본 사람들의 얼굴을 오늘 다시 기억해내지 않아도 될 뿐이었다. 해야 할 일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나에게 맞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그 이유만으로 나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저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돈 계산을 못하고, 여전히 운송 프로그램을 잘 다루지 못하며, 여전히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리가 바뀌니 저자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방향은 반대지만 나의 경우도 그렇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단지 자리만 바뀌었을 뿐인데 나는 일을 못하는 못난이가 되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니 속이 몹시 상했다. 문과생인 내가 이과 계열 책을 만들고 있으니 엇나가도 한참 엇나가긴 했다. 무모한 도전을 했던 것인가, 역시 이 일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인가.
나는 그대로인데, 단지 자리가 바뀐 것뿐인데 나는 바보가 되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못한다 못한다 소리를 들으니 자꾸 내가 못하는 점들만 눈에 들어왔다.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갈수록 점점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일 잘한다고 칭찬받던 나는 이제 영영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예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일인데, "아 내가 이런 것도 못했어?" 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신세 한탄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핸드폰에 있는,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열어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예전 사진들에도 그 흠이 있는 것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건 최근에야 발견했는데? 이상한 생각에 사진들을 몇 장이나 확대해봤지만 역시 같은 위치의 흠이 맞았다. 심지어 노화 때문에 최근에야 생긴 거라 믿은 그늘도 예전 사진에 그대로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 얼굴 그 부위엔 전부터 흠이며 그늘이 있었다는 걸. 적어도 사진을 찍었던 당시, 그러니까 3~4년 전부터 그 자리에 같은 흠이 있었다는 걸. 단지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예전엔 있는 줄도 몰랐던 그 부분을 이제야 발견하고 온종일 신경 쓰며 살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간의 고뇌가 허탈하게 느껴졌다. 내 흠만 신경 쓰고 들여다보던 며칠이었다. 어째서 나는 스스로의 단점을 확인하려 애썼을까. 남이 해도 기분 나쁠 짓을 왜 내가 직접 하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예전부터 있던 못난 점을 지금에야 들여다보는 것일까? 관심도 없고 눈길조차 안 주던 부분들을 이제야 신경 쓰는 것일까? 맞다, 나는 원래 이랬다. 전에도 이랬고 지금도 이렇다. 원래 내가 가진 꼴이 이렇다. 자리가 만들었다고(?) 오해받던 학생회의 나도, 일 잘한다고 칭찬받던 첫 직장의 나도, 월급 값은 제대로 하냐며 구박받는 지금의 나도...
여전히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못난이, 바보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나에게 안 맞는 옷을 입어서 불편한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은 그만두어야겠다. 그리고 이제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겠다.
저자처럼 나도,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해야겠다.
책 제목 :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분야 : 시/에세이
소분야 : 한국에세이
지은이 : 도대체
출판사 : 예담
쪽수 : 272쪽
출간일 : 2017년 09월 25일
ISBN : 9788959135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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