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대리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대리인가.
나는 주인으로, 주체로 살고 있는가." 책을 읽으며 그런 고민을 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를 쓴 김민섭 저자의 다음 책이다. <지방시>는 읽지는 못했지만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대리사회>를 먼저 보게 되었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등 자신의 직업과 관련한 책이 꽤 출간되었다. 이런 책을 '르포르타주'라고 부르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르포'라는 말은 이전에도 많이 들어본 말이었는데, 르포르타주라는 말의 준말이었는지도 이번에 알았다.
르포르타주(reportage) : 영화·신문·방송·잡지 등에서 현지로부터의 보고 기사·사회적인 현실에 대하여 보고자의 주관을 섞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재의 생생함과 박진감이 특징이다. (출처 : 위키백과)
지방대 시간강사였던 저자가 대리운전 기사(이하 대리기사) 일에 뛰어들게 되면서 겪은 일을 자세히 적었다. 대리기사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용어와 표현 덕에 내가 대리기사가 된 듯한 착각도 들었다. 물론 대리기사 일에 대해서만 적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전공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고 '인문학'이라고만 나오는데, 그래서인지 작은 사건 하나에도 인문학 고민과 사유가 묻어난다.
대리운전을 하며 느낀 불편함을 세 가지 통제로 정리해낸 부분을 봐도 그렇다. 대리기사로 운전석에 앉으면 손님(차주)에게 맞춰진 운전 환경을 내게 맞게 수정할 수 없다. 운전의 기본 중 기본은 의자, 사이드미러, 백미러 등을 조정하는 일임에도 할 수 없다. 운전 외 다른 행동은 하지 못한다. 손님과 나눌 수 있는 대화도 한정적이다. 행동과 대화를 통제받는 것에 더해, 생각하는 것 역시도 통제받는다. 대리기사로 다른 이의 운전석에 앉아볼 일이 없었던 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앉아 보았던들, 이렇게 풀어낼 수 있을까.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그런 간단한 조작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사이드미러나 백미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그럭저럭 운행할 수 있으면 그대로 두고, 의자의 기울기에도 몸을 적응시켜 나간다. 차의 주인이 자기 몸에 맞춰 조절해 놓은 것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에어컨이나 히터를 작동시키거나 음악의 볼륨을 조절하는 일 역시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말'의 통제다.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대리기사는 거의 없다. 차의 주인이 화제를 정하고 말을 건네면 반가이 화답하지만, 그가 침묵하면 나도 묵묵히 운전만 한다. (중략)
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중략)
타인의 운전석은 이처럼 한 개인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검열하고 통제한다. 신체뿐 아니라 언어와 사유까지도 빼앗는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간다. '과연 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저자 역시도 지방대 시간강사로, 대학에서 주체적인 인간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을의 공간'에 자리하며 그것에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운 우리는 '주체로서 사유할 자유'를 잃었다.
노동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 대목이 꽤 등장하는데, 그 부분들도 인상 깊었다. 노동은 이러해야 한다, 노동자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등 단호한 서술이었는데도 읽으면서 불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말에 설득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질문한 것은 "나는 주인으로/주체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가족에게, 나를 대리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았다. 학생일 때를 제외하고 사회인이 되어서, 임용고시 준비를 한다며 가족에게 나를 대리하게 했었다. 생각해 보면 직장인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끼니며, 빨래, 청소 등 온갖 집안일을 대리해 주고 계시니 말이다(적고 보니 '육아'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연구자로 있는 동안, 외로운 한 존재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들이 상처받기 이전에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모두 추억이 될 것이라 믿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유소에서 일했을 때, 대형마트 주차요금 정산원으로 일했을 때 생각도 났다. 짤막하게 던지는 인사 한마디나 작은 배려 하나로도 그 사람(손님)의 품격이 느껴졌다. 저자의 아내가 아이의 장난감 가격을 1대리, 2대리로 생각한 것처럼, 이거 하나 사려면 몇 시간 일해야 하는지 시급으로 따져 1시간짜리, 2시간짜리로 말하기도 했다. 아가씨(심지어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야, 너 등 함부로 부르는 호칭에도 묶여 보고,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고개를 숙였다. 그때 '르포르타주'를 알았더라면 근무하며 생긴 일을 밑거름으로 무언가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글쎄. 그런 통찰력은 지금도 부족한걸.
대리기사의 애환을 한 권의 책으로 전부 체험하기는 부족하겠지만 콜 하나는 받은 기분이다.
책 제목 : 대리사회
분야 : 정치/사회
소분야 : 사회학일반
지은이 : 김민섭
출판사 : 와이즈베리
쪽수 : 264쪽
출간일 : 2016년 11월 28일
ISBN : 978893785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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