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날을 맞아, 가족과 극장을 찾았다. 가족과 함께 보기로 한 영화는 <국가부도의 날>이다.
지난겨울 개봉한 <1987>을 보며, 점차 내가 아는 '그때 그 시절'이 스크린 관에 옮겨지는구나 했다. 이번에는 IMF 때다. 사실 IMF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을 말하므로 'IMF 때'라는 말은 잘못 사용한 말이다. 정확히는 외환 위기로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때라고 표현해야 맞겠다. 그래도 내게는 IMF 때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IMF 때 이야기인데, 보다가 마음 아프지 않겠어?"라고 농담을 던졌을 정도로, 어느 가정에나 있는 그 시절 힘겨운 이야기가 우리 가족에게도 있다. 그때는 어려서 IMF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우리 집이 망했다는 것만 알았다. 그래서 내가 몰랐던 내용을 이 영화로 조금이나마 알고 싶은 기대감이 있었다.
'IMF 외환 위기 당시 비공개로 운영되었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 한 줄에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인물이나 상황은 허구(fiction)로 실제 대책팀과는 다르겠지만 영화 속에 그려지는 인물들은 그 시절을 버텨낸 우리네 부모님의 이야기였다.
※ 스포일러 주의 : 영화를 보고 난 감상을 적은 것이고 결말과 관련한 주요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한시현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할까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은 국가부도의 위기 상황을 바로 알려 국민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고 건강한 중소기업이라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저히 비공개로 하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과 대립한다.
한시현의 주장에는 단순히 계산기로 두드려 나오는 값 외의 것도 포함한다. 물론 그의 주장은 정확한 값을 바탕으로 현재 상황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서민들의 생활이라든지 고용 환경이라든지 하는 삶의 질에 관련한 것도 포함한다. 그것은 숫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숫자 논리로 똘똘 뭉친 재정국 차관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발언권을 뺏겼다고 봐야 맞을지도). '그것만은 안 된다, IMF 구제금융 신청만은 막아야 한다, 아직 시도해 볼 방법이 있다'는 주장을 스크린 밖에 있는 나 역시 공감하지만 함께 말문이 막히고 만다.
한시현의 주장대로 IMF 구제금융을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우선 다른 방도를 찾기로 결정한 경제수석(엄효섭 분)이 하루아침에 새 경제수석(김홍파 분)으로 바뀌어도 한시현은 여전히 특별팀에 남아 있다. 이것이 영화이고, 그가 이 영화의 주연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한시현이 사직서를 내고 떠나지만 현실에서는 한시현이 가장 먼저 제거되지 않았을까. 한시현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암담하다. 부디 그것은 아니길 바란다.
기회주의자 윤정학의 씁쓸함
윤정학(유아인 분)은 경제위기를 직감하고 고려종금을 그만두고 나온다. 자신의 주요 고객을 끌어모아 투자설명회도 연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금융맨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가 금융맨 시절 얼마나 유능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곧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말은 다들 믿지 않는다. 노신사(송영창 분)와 오렌지(류덕환 분)만 빼고.
영화 내내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는 재정국 차관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맞게 논리를 펼치고 움직이는 것이라 감정의 동요가 없다. 그러나 윤정학은 다르다.
윤정학의 예상대로 흘러가며 큰돈을 쥐게 된 상황에서, 오렌지와 윤정학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크게 한몫 챙겼다는 오렌지의 행동은 철없어 보이고, 그의 뺨을 (후려)치는 윤정학의 태도는 과하게 무거워보였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겠다는 거짓발표를 보며 '속지 않을 것'이라고 분노하는 장면을 보면 이후 등장한 노래방 장면과 묘하게 엇박자다.
오렌지는 탬버린을 흔들고 노신사는 노래를 부르는 그 장면에서 윤정학은 가만히 앉아 술만 마신다. 그렇게 분노에 떨더니 승리(?) 이후에는 차분하다. 그의 표정은 오히려 씁쓸하기까지 하다. 대사는 없었지만 그는 '나라가 망했구나. 정말 망해버렸구나.'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름 있는 자와 이름 없는 자
<국가부도의 날>에서 극 중 인물의 이름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힘쓰는 한시현과 그의 팀원은 이름이 있다. 한시현을 위해 주먹질도 불사 않는 남자 팀원에게는 이대환(조한철 분)이라는 이름이 있고, 여성비하 발언에 분노하고 야무지게 일 처리 해내는 여자 팀원에게는 강윤주(박진주 분)라는 이름이 있다.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평범한 서민의 표상인 이들에게도 이름이 있다. 중소기업을 이끄는 공장주에게도 갑수(허준호 분)라는 이름이 있고, 그의 부인에게도 희원(염혜란 분)이라는 이름이 있다. 보통 '갑수의 처'라고도 나오는 그 역할에 말이다. 갑수의 동업자에게도 영범(전배수 분)이라는 이름이 있다.
국가부도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는 금융맨에게는 윤정학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러나 그의 덕에 큰돈을 거머쥐는 노신사와 오렌지는 이름이 없다. 그저 노신사와 오렌지이다.
이 기회에 판을 뒤집으려는 재정국 차관도 이름이 없다. 본인은 생각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시시콜콜 차관에게 질문하는 새 경제수석에게도 이름이 없다. 한시현이 계속 올린 보고서를 제때 확인하지 못한 한국은행 총장도 그저 '총장'일 뿐 이름이 없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때로는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름 있는 사람들이란 관객들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 것
2001년 여름, IMF 관리 체제에서는 벗어났지만 우리나라 상황은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졌다. 슬프게도 한시현이 그렇게도 막으려 했던 그런 세상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 말이다. 영화 마지막에, 감독은 한시현과 윤정학의 목소리를 빌어 말한다.
항상 깨어 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것이 이 영화가 20여 년 전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 아닐까.
영화제목 : 국가부도의 날
영문제목 : Default
장르 : 드라마
감독 : 최국희
출연 : 김혜수, 유아인, 허준호, 조우진, 뱅상 카셀
상영시간 : 114분
등급 : 12세 관람가
개봉일 : 2018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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